교인들 중에는 내 힘으로만 사는 무력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내 힘으로만 사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다니는데 아무런 능력도 비전도 아무런 열정도 없다. 그는 무엇이 잘 되면 교만해지고 무엇이 잘되지 않으면 우울해 지는 초라한 그리스도이다. 그는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스스로 말씀을 읽거나 스스로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나 성경에 나오는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로 살아간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늘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 외에는 불신자와 거의 차이가
여러분 교회에서 복을 말하면 촘 촌스럽게 여기고 기복주의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무나 돌에다가 복을 빈다면 그것은 기복주의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부모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복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광야를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제사장의 축복을 매일 하라는 말씀이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기쁨의 교회 교우들은 이 축복의 중요성을 알고 꼭 축복의
사람은 인생을 사는데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시계처럼 시간이 흐르는 데로 사는 삶과 나침반처럼 목적을 향해 사는 삶입니다. 시간이 흐르는 데로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이라는 시간을 낭비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을 향해 사는 사람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산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더는 나라도 없는 서러운 노예로 태어나 일찍 부모가 죽는 고아로 자랐지만 하나님은 에스더를 향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에스더는 고아로 자란 노예인 자신에게 그렇게 큰 하나님의 계획이
에스더서의 주제는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으시지만 늘 믿는 자를 도우시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주제도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고 승리케 하신다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 왕궁에 일찍 에스더를 넣어두어서 유대인들이 모두 죽기 직전에 에스더를 통해 유대인들을 모두 구원하십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섭리는 ‘미리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인간은 미래를 1초 후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자
여러분 결혼식장에 가면 ‘꽃 길만 걸으세요’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 보면 인생은 꽃길만 펼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원치도 않았던 고난의 길, 거친 광야 길이 나타납니다. 성경의 무대인 이스라엘은 국토의 50%나 광야입니다. 대표적으로 유대 광야, 아라바 광야, 네게브 광야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르 광야, 신 광야, 시내 광야, 바란 광야 등이 있습니다. 그만큼 광야가 많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광야라는 단어는 270번 나옵니다. 광야는 거친 땅, 빈들, 사막, 불모지를 포함합니다. 광
작은 시골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에 신부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그만 실수를 하여 성찬으로 사용할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즉시 소년의 뺨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썩 물러가 다시는 이 성찬 제단 곁에 오지마” 이 소년은 그 이후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커서는 유고슬라바비아의 공산주의 독재자인 티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또 다는 큰 도시의 천주교회에서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성찬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어린 소년에게 따스한 눈길로 속삭였습니다. “네가 앞으로 훌륭한 신부가 되
우리는 계속 마태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바로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이 왕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염두해 두어야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다윗 왕족의 후손 즉 왕이라는 말합니다. 오늘 볼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이 유대 왕으로 태어났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은 계속 예수님이 왕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왕이신 예수님을 대하는 네명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