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7
광야의 은혜
신2:7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인생을 무엇에 비유하면 좋을까요?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광야로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구약성경에만 광야라는 단어가 270번 나옵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 인데 이 말은 거친 땅, 빈들, 사막, 불모지로 번역이 됩니다.
광야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광야나 사막 PPT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성지순례를 가서 이스라엘 광야에 가보면 숨이 탁 막힙니다.
산 같은 것이 있긴 한데 나무 한 그루 없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만 있습니다.
광야의 특징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씨를 뿌릴 수도 없습니다. 광야는 먹을 것도 없습니다. 광야는 마실 물도 없습니다. 광야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석류도 없습니다.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습니다.
광야는 모래나 바위, 돌로 덮여 있어 풀 한포기 조차 구경하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곳입니다.
광야는 낮에는 얼마나 뜨거운지 기본이 40도이고 조금 더 더운 곳은 50도입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없는 투성입니다.
무엇보다 사막은 불확실한 곳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광야와 사막과 같이 불확실함과 모호함이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가 교차하는 것 같은 변덕스러움이 있습니다.
목마름과 허기를 쉽게 느낍니다. 뱀과 전갈 같은 예기치 않았던 위험이 찾아옵니다. 신기루의 유혹을 경험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광야와 사막은 우리가 볼 때 아무쓸모없는 곳인데 지구상에서 1500만㎢를 넘는 광대한 면적을 차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 육지의 1/10이상 광야와 사막입니다.
왜 하나님은 광야를 만들어 두셨습니까?
광야에는 우리가 모르는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요즈음 여러분의 삶이 광야처럼 되었습니까?
재정이 어려워졌습니까? 사람들이 떠났습니까? 한치의 앞이 보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습니까?
광야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야에는 어떤 은혜가 있습니까?
첫 번째로 광야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자신이 히브리 노예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족인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묻었습니다. 모세는 이 일이 발각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 제사장을 만나 그의 딸과 결혼을 하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가 나이 80에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광야 서쪽에 있는 호렙 산에 갔습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3:1)
모세는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고 이제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자신의 양이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양이 아닌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년 만에 삼촌 양의 반을 자신의 양떼로 다 만들어 큰 거부가 되었습니다. 야곱에 비하면 지금 모세는 결혼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 자신의 양이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모세는 과거에 이집트 대 제국의 왕자로 살았습니다. 그가 양한마리 두 마리 늘어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사실 나이 80이 되었지만 삶에 아무런 열정도 애착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한 그의 마음은 텅 빈 마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출3:2-3)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떨기나무는 굉장히 큰 나무가 아닙니다.
떨기나무는 나무라기보다 키 2m도 안 되는 나뭇잎도 나무 열매도 없는 가시만 가득한 관목입니다.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가까이 갔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3:4)
여러분 광야라는 히브리 말은 ‘미드바르’입니다.
그리고 ‘말하다’는 히브리말은 ‘다바르’입니다.
이 두 단어는 똑같은 어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관찰입니다.
말하다와 광야가 같은 어원이라는 것은 광야에서 말씀하신다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3:10)
모세는 나이 80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광야 한복판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과 모세 5경의 율법을 들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3:1-2)
눅3장 1-2절을 잘 관찰하면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눅3장은 제일 먼저 디베료 로마 황제가 나오고 그 다음 빌라도 총독이 나오고 그 다음 여러분봉왕이 나오고 그 다음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이 나오고 제일 마지막에 빈들에서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은 로마 황제나 유대를 다스리는 정치인이나 대제사장이 있는 왕궁이나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아주 어린 나이에 제사장 사가랴의 집을 떠나 빈들, 즉 광야로 나갔습니다.
세례요한 당시에 제사장의 아들은 빈들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서 공부를 하고 수련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빈들로 나갔습니다.
세례요한은 내일이 보장된 제사장의 길을 버리고 예루살렘의 문명 세계를 등지고 오로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들로,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외치는 자로 만족하였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