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안에서 이긴다.
삼하9:1-13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은 바로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말로 은혜라는 말은 헨이라는 말과 헷세드라는 말이 있습니다.
헨이라는 말은 왕이 마차를 타고 가다가 마차에서 내려와 거지의 손을 잡아 주고 선물을 주는 과분한 행위를 말합니다.
헷세드라는 말은 은총, 인자, 호의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 말은 상대방의 행위에 의해 주어지는 사랑이 아니고 상대방과의 약속에 의해 주어지는 불변의 사랑입니다.
헨과 헷세드는 둘 다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은혜는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무조건 베풀어 주는 선물입니다.
은혜에 대해 우리가 한 가지 더 강조한다면 그것을 완전히 무료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푼 자는 절대로 그 은혜를 갚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를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공짜이고 갚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의 보상으로 돌아갑니다.
이 세상은 수고하고 노력하는 만큼 보상을 받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조금 더 성공을 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해야합니다.
남들 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까지 일을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성과 주위, 업적주의, 성공주의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다람쥐가 챗바퀴 돌 듯 끝없이 뛰고뛰고 또 뛰어야합니다.
인생을 성과주의로 산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지침과 공허뿐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서 잘 되면 교만하여 망하게 되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으면 분노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고 불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인을 녹초가 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은혜로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하나님은 이 온 우주 만물을 그냥 아무런 노력이나 공로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는 그냥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일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빛이 생긴 것 때문에 감사해 보신 적 있습니까?
빛이 없다면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도 없습니다.
빛이 없다면 아름다운 색깔들을 알 수도 없습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흑암속에 갇혀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창조를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은 다릅니다.
어떤 시각장애인이 개안 수술로 시력이 회복이 되면 그 사람은 빛으로 인해 온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빛이 늘 있는 것이지만 시력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빛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빛은 시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시력을 잃은 사람에게나 모두 분에 넘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6일동안 아름다운 지구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이 지구에 태어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손과 발과 귀와 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태어나 보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29-30)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시고 그냥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습니다. 즉 모든 의식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지구에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혼자 가지시지 않으시고 그냥 공짜로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은혜입니다.
여러분 해가 뜨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 장엄한 해가 바다에서 쑥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거대한 산들과 바다와 굽이치는 강들과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아름다운 꽃과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소리와 맛있는 과일과 채소와 대 자연이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연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풍성하고 풍요롭습니다.
왜 그렇게 풍성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온 우주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4-26)
저는 오늘 우리가 잘 아는 은혜의 사건을 나누어보길 원합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삼하9:1-3)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 다윗은 왕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왕이 된 지 20년 정도 지난 태평성대에 자신의 친구였던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 왕자를 기억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후 그것을 시기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왕자인 요나단이 다윗을 구해 주었습니다.
사울왕과 요나단 왕자는 블레셋과 전쟁을 치루면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이스라엘 온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 왕의 가족들은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원래 정권이 바뀌면 그 이전의 왕의 가족들을 몰살 시키는 것이 동양이나 서양이나 할 것없이 자연스러운 관습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왕자의 아들, 므비보셋을 돌보는 유모는 그 아이를 데리고 도망을 가다가 그 아이가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됩니다.
성경은 그 아이의 이름이 므비보셋이고 5살이라고 말합니다.
그 뒤 므비보셋은 몰락한 왕가의 손자로 숨어 살게 됩니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흘러 므비보셋은 20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도 하고 아들도 하나 있었습니다.
다윗은 문득 자신이 어려울 때 친구였던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요나단 가족에게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은총’이라는 말이 바로 헷세드로 약속을 지키는 변함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 왕가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은 정치적인 쇼가 아닙니다.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은혜를 베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번이나 은총을 베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신하들에게 사울왕가에 아직도 살아 있는 왕족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사울 왕가 땅을 관리하는 시바라는 종이 와서 요나단의 아들이 하나 있는데 다리를 저는 자라고 비꼬았습니다.
사무엘하 5장에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려 할 때 예루살렘에 살던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 군대를 우습게보고 다리 저는 자와 맹인도 너를 물리칠 것이라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다리저는 자는 다윗군대를 조롱하는 속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요나단의 아들이 다리를 저는 자라는 말에 게이치 않고 그가 어디 있느냐 묻고 그를 데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선물입니다.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삼하9:4-5)
요나단의 아들이 살고 있는 곳은 로드발이었습니다.
로드발이라는 말은 ‘로 데바르’입니다. 이 말은 ‘목초가 없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불모지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 요나단의 아들이 절룸발이거나 불구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 실패한 자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다윗은 그 사람이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사람의 형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나단과의 약속이 중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