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4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큰 희망은 없다.
고전15:55-58
여러분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는 완벽하였는데 인간들이 죄를 지음으로 세상의 타락하고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희망보다 절망적인 소식이 더 많습니다.
전쟁, 범죄, 인종차별, 빈곤, 분노, 기근과 역병, 아동학대, 부정부패…
결론은 사망입니다.
여러분 인류에게 사망을 이기는 희망이 있을까요?
네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계신다면 사망을 이기는 가장 큰 희망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여 살아 계시느냐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랐고 나이 33세에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이 정말 부활하여 살아나서 지금도 살아 계실까요?
저는 오늘 정말 예수님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게 된 자들을 살펴보고자합니다.
첫 번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과거에 귀신들린 여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셔서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자로 헌신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따라다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아무런 힘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자 동시에 막달라 마리아의 꿈도 죽고 열정도 죽고 희망도 죽고 미래도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절망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예수님이 죽자 그녀의 마음에 기쁨도 사라지고 평안도 사라지고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습니다. 말았습니다. 그녀의 삶 전체가 산산조각이 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니고데모가 와서 백근이나 되는 엄청난 향품을 부은 것을 보았지만 그래도 자신도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더 붓기를 위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이 묻혀 있는 무덤을 향해 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20:1)
막달라 마리아는 돌문이 열린 것을 보고 급히 돌아서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20:2)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급히 무덤을 향해 뛰어 갔습니다. 그들이 무덤을 향해 뛰어간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말에 시신을 찾고자 함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앞장서서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을 향해 뛰어 갔고 그 뒤에 베드로가 도착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20:6-8)
이 구절은 마치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간 것처럼 세마포는 그대로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만 따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온몸을 감쌌던 비싼 세마포가 그대로 두고 곧 부패하고 썩어져 버릴 알몸만 가져가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친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왜 불경스럽게 옷을 벗겨 알몸으로 모셔 갔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그냥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면 왜 수의가 갈기갈기 찢겨져 있지 않고 몸을 감은 수의가 그대로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만 따로 가지런히 두었습니까?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이 장면을 보고 그냥 나갔고 세심한 요한도 무덤 안에 들어와서 이 장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이 장면을 본 요한은 천천히 자세히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믿은 자는 요한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빈 무덤 안에서 나와 다시 돌아가고 막달라 여전히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너무 슬픔이 커서 예수님이 바로 곁에 와 계셔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20:16)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곧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꽉 붙잡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20:17)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나를 꽉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을 멈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나는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그렇게 붙잡을 필요가 없다. 나는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너희들에게 성령으로 와서 너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이 구절에 아는 것은 이론적으로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닌 체험적인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기도를 통해, 예배를 통해,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주님과 더불어 주고 받고 말하고 듣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교제는 예수님이 죽은 스승이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 계신 주님일 때 가능합니다.
언젠가 타임지표지에 ‘신은 죽었다’고 커다랗게 실렸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목사님에게 목사님은 이 표지 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무슨 말입니까? 방금 그분과 대화를 하였는데요.
네,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늘 우리와 대화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은 약간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셔야만 마리아에게 지금까지 지냈던 친밀감과는 전혀 다른 더 놀라운 친밀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14장에서 16장까지 말씀하신 성령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지 말라는 말씀은 내가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올라가 성령을 보내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나를 실감하게 하시고 나와 함께 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순간 순식간에 슬픔이 사라지고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 할 새” (마28:8)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뛰어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20:18)
그녀는 제자들에게 뛰어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본 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봅니까?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에겐 언제나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를 사랑하십시오. 늘 살아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도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이 지난 안식 후 첫날 저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때 도마가 없었습니다. 조금 후 다시 도마가 왔을 때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니 “말도 안된다”고 하며 자신은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져 보고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아야 부활하심을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20:24-25)
도마의 상식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의 찔림을 받은 분이 살아난다는 것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 중에도 예수님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도마의 후예들입니다.
도마는 분명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냥 희망고문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마가 참 잘 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12제자 무리안에 계속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였지만 예수를 믿는 제자의 무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교회에 와 있는 자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내를 따라 왔던, 억지로 왔던, 어쨋든 교회에 와 있는 자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은 도마 한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 일부러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고 곧바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7)
도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이 한 말을 예수님께서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도마가 몰랐지만 예수님이 도마 곁에 늘 계셨던 것입니다.
도마는 자신이 다른 제자들에게 한 말을 지금 예수님이 똑 같이 하시는 것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곧바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
도마는 과거에 예수님을 그냥 큰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 있는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도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나타나자 선생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는 자기주장,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 자랑 다 버렸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29)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지금 살아계시고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