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제 2차 선교여행을 아시아로 가길 원했지만 성령께서 그를 마케도냐 즉 유럽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지도부탁합니다.)

그래서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다음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다음 베뢰아에 복음을 전했고 그는 가는데 마다 핍박하는 자들이 있어 베뢰아에서 급히 피해 실라와 디모데는 남겨 두고 그를 도와주는 베뢰아 성도들과 함께 급히 배를 타고 베뢰아에서 320km나 떨어진 아덴으로 피합니다.

아덴은 지금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말합니다.

아테네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 3대 주요 도시중에 하나입니다.

아테네는 철학, 문학, 예술등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특별히 아테네는 서양철학의 발상지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에피쿠로스와 제논의 활동 본거지였습니다.

바울당시 아테네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도시가 되었지만 로마는 아테네를 자유도시로 독립성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테네라는 이름은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아테네는 3만개가 넘는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아주 심한 도시였습니다.

아테네의 중심에는 높은 곳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습니다. (사진 부탁)

이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보물 1호입니다.

이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여신상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거대한 건물입니다.

그리스 성지 순례를 가면 이 장소를 가게 됩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핍박을 피해 배를 타고 아덴에 내려 실라와 디모데를 며칠 동안 기다리면서 혼자 아테네 성을 둘러 보았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성안 거리마다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의로운 분노가 생겼습니다.

같이 행17:16절을 보겠습니다.

“(1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17:16)

여러분 바울은 지금 도망자로 베뢰아에서 아덴에 피신 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디를 가든지 도망자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외롭다라는 단어가 사치였습니다.

그는 외로움으로 감정 싸움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테네가 이 우상의 도시, 신화의 도시, 쾌락의 도시인 것을 보며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도시일수록 우상과 쾌락과 음란이 가득한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타락해 가는 것에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예물을 갖다 놓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십계명을 던져 깨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양과 소를 파는 것을 보고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서 채찍을 들어 쫓아내었습니다.

특별히 부모들은 자녀들을 망치는 타락한 문화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죄에 대한 분노, 마귀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혼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만나고 길거리에서는 헬라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17:17)

바울은 그 당시 아테네에 유명한 두 철학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입니다.

“(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17:18)

잠깐 이 두 학파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가 세웠는데 이 학파는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인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쾌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죽음 후는 애써 잊으려고 합니다.

아테네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영향으로 쾌락의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현대인들도 쾌락에 빠져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쾌락은 이름 그대로 잠시 기쁨을 주고 큰 손해를 끼칩니다. 대표적인 쾌락은 섹스, 마약, 알코올 중독입니다.

성경에 쾌락에 빠져 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입니다.

그는 쾌락에 빠져 눈이 뽑히고 쇠삿슬에 묶여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쾌락에 빠지면 인생을 다 낭비하고 결국 미래를 망칩니다.

혹시 지금 쾌락에 빠진 자가 있다면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무서운 미래를 불러옵니다.

두 번째 학파는 스토아 학파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제논이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정반대로 쾌락이 아닌 금욕과 마음의 평정을 중요시하고 이성적인 생각을 중요시합니다. 이들은 죽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철학이나 종교는 인간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허무한 인생을 삽니다.

어느 시인이 집안에 앉아 있는데 잠자리 한 마리가 창문으로 거실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 잠자리는 만개의 겹눈, 홑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잠자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한 개의 눈이 없어서 창문 밖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 나는 만개의 지식이 있어도 내가 어디로 가는 지 모르구나 하며 한탄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개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결정적인 한가지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개의 지식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서 무엇을 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철학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하다 어디로 가는지 공부하는 것입니다.

문학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왜 사는지 공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몇천년 동안 철학이나 문학을 공부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인간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쾌락주의인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또 금욕과 이성을 중시하는 스토아 학파들 앞에 서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바울을 말쟁이라고 비꼬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데리고 그 당시 아테네의 광장 법정인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19)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행17:19)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함은 새로운 것을 알기 원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면 관심을 가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마음이 공허했기 때문입니다. 유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아레오바고 법정에는 12명의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테네 사람들의 흥미로운 시사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렸고 특별히 종교적인 문제에 판결을 내렸습니다.

바울은 이제 아테네 최고의 철학자들과 지성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는 9번의 바울의 설교가 나오는데 바울의 설교 8개는 유대인 회당에서 하였고 딱 1개만 광장에서 하였는데 그 한 개의 광장설교가 바로 아레오바고 광장 설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