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월할머니는 아들 영남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사라졌습니다.

최계월할머니는 아들이 사라진 후 사망이 그녀를 덮었습니다. 사는 것이 아무런 재미도 없어졌습니다. 열정도 없습니다. 의미도 없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방송을 통해 자신의 아들이 북한에서 일본 여성 메구미와 결혼하여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삶의 의욕이 생기고 잠자던 열정이 살아났습니다.

여러분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아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82살 노모가 아들을 만난다는 기대로 가슴이 부풀렀습니다.

2006년 6월 28일 금강산호텔에서 45세 된 아들 김영남 씨를 만났습니다.

눈물바다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희망을 주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끝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 후에 부활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과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가는 길도 다르고 가는 목적지도 다르고 가는 방향도 다 다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죽음을 향해 살고 죽음 후 부활이 기다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활을 향해 삽니다.

죽음을 향해 사는 자들은 오늘 순간을 즐기는 순간을 위해 살지만 부활을 향해 사는 자들은 영원을 위해 삽니다.

여러분 곧 없어져 버릴 순간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영원을 위해 사십시오.

 

여러분 정말 부활이 있을까요?

부활은 현실의 삶이 어려워 도피하기 위해 만든 막연히 있을 것 같은 희망사항입니까?

만약 죽음 후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말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17)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마지막 1주일을 집중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되려면 첫째로 예수님이 정말 죽어야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사복음서는 모두다 예수님의 죽음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의 군졸들에 의해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으로 끌고 가셨고 그다음 빌라도 총독에게로 가셨고 그 다음 헤롯왕의 궁전으로 갔다고 다시 빌리도 총독의 관저에 갔다가 그곳에서 39대의 매를 맞으시고 60kg정도 되는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둔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 틈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 형으로 죽으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죽게 만든 장본인들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인기가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지자 자신들의 종교적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여 십자가 형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법으로 신성모독죄를 적용하여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일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너무 많았기에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죽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이 버린 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21:23)

유대인들은 신명기에 나오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라는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으면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로마의 빌리도 총독에게 계속 요청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대제사장은 자기들의 사람들을 시켜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에 죽는 지 확인시켰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지도 않았는데 십자가형에서 풀려난다면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으로 죽자 더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에 죽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죽게 하는 데 책임자는 빌라도 총독에서 근무하는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밑에 100명의 로마 군사를 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빌라도 총독의 명을 받아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까지 데리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는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십자가형틀에 못을 박아 죽이는 전문가였습니다.

십자가 형은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 서서히 피를 흘리며 죽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시간을 길게 하기 위해 발밑에 각목을 받혀 줍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매달린 자는 온몸이 밑으로 축 쳐지면서 호흡곤란으로 5분 만에 질식사로 죽는 것을 막아 줍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몸이 축 쳐지면 다리 밑에 있는 각목에 힘을 주어서 위로 올라와 호흡을 합니다. 그러고 다시 몸이 축 쳐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6시간 동안 계속 몸이 축 쳐졌다가 위로 올라가 호흡을 하는 것을 되풀이 하시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자 로마 병정들은 해가 지기 전에 십자가에 달린 자들을 빨리 죽게 하기 위해 다리 정강이 뼈를 부서 버립니다. 그러면 호흡 곤란으로 곧바로 죽게 됩니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의 다리 뼈를 부수기 위해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에 다가갔는데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강도의 다리뼈는 부수었지만 예수님의 뼈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옆구리에 창을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옆구리 심장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심장이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주도한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하시는 가상 칠언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난 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눅23:47)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대신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다 지켜 본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치하였습니다.

한국은 사람이 죽으면 삼일 동안 안치하는 삼일장이나 오일장을 하지만 유대인들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사람이 죽으면 그날 24시간 안에 무덤에 넣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말 죽지 않았다면 절대로 무덤에 넣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 말고도 고대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그가 남긴 책에서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극형을 당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도 예수는 십자가 형으로 죽었다고 그의 책에서 기록하였습니다.

타키투스나 요세푸스는 둘 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고대 문헌 45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