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묘지에 있는 한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달았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여러분 남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내가 변해야합니다.
여러분 오늘 요나서 4장을 통해 남이 아닌 내가 변화되는 큰 은혜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요나서 4장을 같이 보겠습니다.
요나서 4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요나의 분노입니다. (1-4절)
“(1)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욘4:1-4)
요나는 하나님께서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신 것을 매우 싫어하고 성을 내었습니다.
‘성을 낸다’는 히브리말은 분노가 심해서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상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께 화를 버럭버럭 낸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여러분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불평을 토하고 화를 내는 것은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있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에게 자신이 니느웨에 가지 않고 닷시스로 도망간 이유를 말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는 죄악의 도성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략한 악한 자들이 사는 곳이기에 마땅히 멸망당해야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들이 회개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은 익히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은혜가 넘치는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34:6)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베푸시길 좋아하시고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시86:15)
느혜미아도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느9:17)
요엘도 같은 말을 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2:13)
요나는 자신이 선민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선민의식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선민의식은 유대인들에게 자존감을 주고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이기는 힘을 가지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 선민의식이 감사가 아닌 교만으로 바뀐다면, 이 선민의식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한다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다른 나라를 살리는 복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복의 근원이 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19:5-6)
제사장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자들입니다.
요나는 건강한 선민의식이 아닌 삐뚤어진 교만과 고집과 아집에 빠져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단정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란 원래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런 요나의 모습은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집안에 있는 형과 비슷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아버지 품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을 돌아온 탕자이고 탕자가 돌아왔을 때 집안에 형이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집안에 있는 탕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