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14
아버지 품으로
눅15:11-32
은혜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데도 받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가정 외에는 경험 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은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십니다.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공부도 시켜 주고 자녀가 아프면 부모의 돈을 다 써가면서 치료해 주고 자녀가 아파하는 것보다 본인이 더 아파합니다.
부모의 은혜는 절대사랑입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먼지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은혜시리즈를 하면서 이 탕자의 비유가 은혜 시리즈의 절정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는 두 아들과 종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로 집나간 둘째 아들 탕자를 보겠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제일 불쌍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부모를 떠난 고아입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는 항상 불안합니다. 늘 외롭습니다. 집으로 돌아와도 허전합니다. 텅빈 마음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고아의 영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아의 영이 있는 자는 채워지지 않는 텅빈 공허한 마음뿐입니다.
이 고아의 영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후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이유는 교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하나님과 친밀감을 누리며 사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사탄은 자신에게는 없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빼앗아 가길 원했습니다.
아담은 사탄의 말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아담이 잃은 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그후 인류는 아버지를 떠난 고아의 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마음에 사탄이 속삭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네 마음대로 살아라.
둘째 아들은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가서 유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불효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마음에는 이미 아버지가 죽은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따뜻한 품보다 돈을 원했습니다.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는 아버지와의 집에 있는 것이 지겨웠습니다.
그는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는 오로지 자기만 생각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란 단지 유산을 물려줄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받을 마음의 상처, 아들에게 거절당하는 고통, 사회적 비난 등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보통 부모들이 하듯 아들을 호되게 야단하고 혼내주지 않고 그냥 둘째 아들의 말을 듣고 원하는 대로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두 아들이 있으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의 3/2를, 둘 째 아들은 3/1을 물려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내어 놓고 그 땅을 팔아 둘째 아들의 몫을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순간 탕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예 유대인들이 살지 않는 국경을 넘어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율법도 예배도 아버지의 간섭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둘째 아들이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자 잠시 자유 한 것 같았지만 크나큰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살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돈으로, 쾌락으로, 아버지를 떠난 텅빈 마음을 채우려고 하였지만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은 다 낭비하였고 때마침 그가 있는 나라에 큰 흉년이 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 흉년이 온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입니다.
둘째 아들은 먹을 것이 없자 들에 가서 돼지를 쳤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불결한 짐승으로 여겨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을뿐더러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 문학에서는 돼지를 사육하는 자는 저주받을 자로 취급합니다.
둘째 아들이 먹을 것이 없어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웠습니다. 이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합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실패한 자입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큰 죄인이며 죽은 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 아버지의 품이 그리웠습니다.
그는 돼지우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15:18)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15:19)
그는 스스로 중얼거렸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가서 “아버지 저를 아들로 여기지 마시고 나를 품꾼의 하나로라도 써 주십시오”라고 해야지 하며 그 말을 연거푸 연습을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20)
둘째 아들이 가장 잘 한 일은 그 막다른 바닥에서 다시 일어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내가 성공한 후가 아닙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내 죄가 좀 해결이 된 후가 아닙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주저하지 말고 지금 가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어도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 1막이 끝이 납니다.
이제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 제 2막이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데 저 멀리에서 아버지가 매일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아들 모양을 한 자가 오는 것을 보고 뛰어 가서 아들을 와락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그 순간에 이미 둘째 아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와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품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은혜)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렘31:3)
여러분 인간의 사랑은 일시적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변덕이 심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아낌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유산으로 100년치를 앞당겨 갔다고 해도 또 하나님은 100년치의 은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끝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돼지 우리 속에서 살다가 돼지 냄새나는 몸으로 다가 왔지만 뛰어가서 그 아들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이 많은 사람이 좀처럼 뛰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아들의 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버지가 죄 지은 아들에게 입을 맞춘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실패한 자들을 향해 뛰어가십니다.
하나님은 냄새나는 자들을 향해 뛰어가십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아직도 내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내가 행한 죄악 때문에 하나님 품에 안기길 주저하고 있는 분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품에 안으시길 원하십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자신이 준비해온 말을 꺼냈습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15:21)
아버지는 그래 알았다. 네가 진짜 회개하였는지 6개월 지나보고 너를 받아줄지 결정하자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으로 오면서 연습한 대사를 꺼내려 하자 입을 막으면서 오히려 선수를 치십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15:22)
아들은 냄새나는 옷을 벗고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종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발에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 당시에 종들은 신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둘째아들은 순식간에 좋은 옷을 입고 가락지를 끼고 신발을 신고 아들로 신분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돼지냄새 나는 타락한 자에서 순식간에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의 노력이 아닌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서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은혜를 느꼈습니다.
여러분 회복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발적인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발로 끝이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