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2

창2:18-25

부부의 행복

 

여러분 이 세상에 가정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가정을 좋아하고 가정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가정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만약 우리에게 가정이 없다면 고아가 되겠지요?

외로움이 밀려오겠지요. 고독하겠지요. 방황하겠지요. 공허하겠지요.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겠지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하는지는 모릅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어야 하는데 가정이 지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정은 부부로 시작됩니다.

부부사이가 바로되면 가정이 행복해 지고 부부사이가 잘 못되면 가정이 불행해집니다.

오늘은 부부주일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행복한 부부의 원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인류최초의 가정은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태초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디자인하셨습니다.

결혼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 결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은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야 하고 여자는 남자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어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이라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런 말은 여자가 남자 보다 못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돕는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에제르’입니다.

이 말은 남성 명사로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자를 돕는 것을 말합니다.

돕는 다는 말이 상대방 보다 열등하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은 나를 돕는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시27:9)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시33:20)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46:1)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70:5)

여러분 하나님이 약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강한 자이시기에 약한 인간을 도울수 있습니다.

돕는 자란 진실로 강한 사람만이 약한 자를 도울 수 있는 도움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약한 자로 알면 인생에 최고의 도움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강한 자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도움없이 완전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도움이 없다면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도움이 없다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아내의 도움이 없어서 무너진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엘리제사장은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제사장이라는 직책은 물려주었지만 정작 중요한 영성을 물려주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두 아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삼상2:12)

결국 엘리의 아들들은 좋은 직책은 가졌지만 전쟁에 나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상하게 엘리 제사장의 부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은혜로 하나님에게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첩을 1000명을 두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나라를 살려야할 사사로 태어났지만 경건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보다 이방여인을 따라다니다가 눈이 뽑히고 머리가 다 잘려나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였습니다.

반면에 경건한 아내의 도움을 받아 위대한 인생을 산 자들도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도움으로 이삭을 낳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도움을 받고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고 예수님을 낳는 로얄 패밀 리가 되었습니다.

사가랴는 엘리사벳의 도움으로 세례요한을 낳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굴라는 브리스길라의 도움으로 바울을 돕는 위대한 부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자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돕는 자라고 해서 아내가 남편 머리위에 있으면 안됩니다.

성경에는 가정의 머리는 남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엡5:23)

아내는 언제나 남편을 돕는 위치에만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머리에 있으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저주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해산의 고통이 커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남편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사모하는 것이 어찌 저주입니까? 그 말은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남편의 주도권을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내가 남편의 결정권을 빼앗는 것이 저주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아내가 남편의 머리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들이여 결정권을 남편에게 넘기십시오.

그것이 지혜로운 아내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적이 아니라 서로 돕는 자입니다.

아내도 남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부관계의 비극은 서로 돕는 자로 있지 않고 서로 이용하려고만 할 때 생깁니다.

행복한 가정은 내 이기심을 버리고 내가 도우려고 할 때 생깁니다.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최고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 하와를 지으시고 아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최초의 수면 마취제를 쓰신 분이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시고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여기에 여자는 히브리어로 ‘이샤’인데 그 뜻은 부드러운, 섬세한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와는 분명 돕는 자인데 부드럽고 섬세함이 있습니다.

아내는 부드러워야합니다. 이것을 강함속에 약함이라고 말합니다.

아내는 강함으로 남편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남편의 마음을 붙잡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하와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찾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저는 결혼을 앞둔 정년들에게 배필을 찾으려고 여기 저기 뛰어 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 주위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주위에 데려다 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자매님들은 백마탄 왕자를 잦으려고 합니다. 어떤 형제들은 백설공주를 찾으려고 합니다.

백마탄 왕자와 백설공주가 있는 곳이 있습니다. 에버랜드로 가면 됩니다.

잠언에 보면 현숙한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19:14)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데리고 오자 아담이 하와를 보자마자 한 말은 내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아담이 하와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창세기 당시에 가장 로맨틱한 고백이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고백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