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동네마다 주말에 가라지 세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집안에 쌓아둔 물건들을 전부 꺼내서 자기 마당 앞에서 파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동네 가라지 세일에 가서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장식용이나 골동품이 될 만한 물건을 찾고 있었습니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대학 총장이였던 남편이 죽고 남편이 쓰던 물건을 고이 간직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의식도 잃자 손녀가 그 물건들을 더 간직할 수가 없어서 가라지 세일로 내 놓았습니다.

그 럭비선수는 두리번거리며 물건들을 살피던 중 크고 아주 멋진 상자가 있어서 열어 보니 그 교수가 평생 받은 훈장, 상장, 기념패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가격을 물어보니 10달러라 하였습니다. 한국돈으로 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팔리지 않아서 구석에 처 박혀 있었습니다. 평생의 자랑거리가 남들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하였습니다. 정말 인생의 허무를 잘 보여 줍니다.

인생의 허무에 대한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말하는 솔로몬도 이미 BC 천년경에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1:2)

그러면 인생이 허무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120년의 인생을 산 모세는 그가 남긴 시편 하나인 시 90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은혜)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90:14)

모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즉 하나님의 은혜가 인생을 만족하게 하고 일평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허무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됩니다.

제가 60평생 살아오면서 발견한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중에 항상 나는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라고 말하고 다녔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마태입니다.

마태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 번째로 마태는 은혜받은 자였습니다.

마태는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허무에 빠져 살다가 큰 은혜를 받고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산 자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9:9)

마태는 그의 직업이 그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는 받는 세리였습니다.

로마시대에 세리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세리는 로마인들입니다. 그들은 주로 토지세와 인두세와 같은 직접세를 거두었습니다. 두 번째 세리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통행세와 같은 간접세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간접세를 거두는 유대인인 세리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원성과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에게 아부를 하면서 동족들에게는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자기 배를 채웠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죄인은 남자는 세리였고 여자는 창기였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세리를 얼마나 멸시하였는지 그 당시 거지들도 세리가 주는 돈은 받지 않았습니다.

마치 우리 한국이 일본 치하에 있을 때 일본 앞잡이들을 향해 침을 뱉었던 것과 비슷하게 천대를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 세리의 원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2:14)

마태복음에는 그냥 ‘세리’라고만 되어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레위라고 불리는 세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의 원래 이름은 레위입니다.

레위는 제사장 가문입니다.

여러분 레위지파를 아시죠? 야곱의 12 아들중 레위지파는 모세가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모였을 때 유일하게 금송아지를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제사장 지파가 되어 성전에서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레위지파로 태어나는 자는 영원히 제사장을 하도록 율법으로 정하였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신10:8)

특별히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이후 제사장의 신분은 급격히 상승이 되어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을 존경하고 흠모하였습니다.

이렇게 존경을 받았던 레위지파의 가문에 태어난 레위인 마태가 유대인들의 조롱을 받는 세리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타락입니다.

레위인인 그가 왜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가 되었을까요?

지금 마태가 앉아 있는 세관은 가버나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도)

가버나움은 갈릴리 동북쪽에 있는 큰 도시입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가장 사역을 많이 한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시고 각종질병을 고친 곳입니다.

가버나움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과 사역을 하신 곳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회개하지 않아서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마11:23)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소돔보다 더 악한 동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곳에서 세리로 살고 있는 마태였습니다.

그는 제사장이 되어야 할 자인데 정반대로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분명 유대인으로 어릴 때 성경을 배웠고 암송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살던 시대에 제사장이란 대제사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마태는 가난한 제사장의 길보다 쉽게 돈을 버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마태는 돈을 벌기 위해 신앙도 버린 자였습니다. 그는 돈과 하나님을 맞바꾸었습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세리가 되려면 적어도 3개국은 능통하게 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아람어입니다. 또 로마인들과 소통을 하려면 헬라어를 해야 하고 또 히브리인이니 히브리어도 해야 합니다.

세리는 계산도 잘 해야 하고 장부정리도 꼼꼼하게 잘 해야 합니다.

마태는 이제 세리가 되어 나름대로 돈을 많이 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양심의 가책으로 죄책감이 있었고 유대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소외감과 수치감이 있었습니다.

마태의 마음 깊은 곳에는 허무와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어느날 예수님이 직접 자신이 있는 세관에 찾아 오셨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마태의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마태의 과거가 얼마나 더럽고 악랄하였는지 알아보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도 죄 속에 앉아 있는 마태라는 그 사람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마태는 병자였습니다.

세리라는 죄에 빠져 자신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중병 환자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죽음이라는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말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보실 때 하나님과 분리된 중병 환자였습니다.

그는 부모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는 지독한 죄인입니다.

그는 민족도 버린 매국노입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는 뻔뻔한 죄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 구제불능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지독한 죄인에게 다가가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중병환자에게 최고의 의사가 찾아오는 것은 최고의 선물이며 최고의 은혜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모시고 그리고 평소에 자신 주변에 있는 세리들을 모아 송별잔치를 하였을 때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어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하며 비아냥 거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9:12-13)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에게는 필요없고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를 찾는 자에겐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처럼 잘 난 나에겐 절대로 은혜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반면에 예수님은 세리처럼 자신이 죄인줄 아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긍휼’을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데 이 ‘긍휼’이 바로 구약의 헷세드 즉 은혜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을 때 귀를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 이런 은혜의 말은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겐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만 필요하다는 말씀은 바로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내가 병든 자입니다. 내가 죄의 병에 걸린 자입니다. 내가 죄의 중독에 빠진 자입니다. 내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입니다. 내가 죄책감의 늪에 빠진 자입니다. 내가 중병 환자입니다.

나에겐 나를 고쳐줄 의사가 필요합니다.

내 스스로, 화냄과 분노와 욕심과 탐욕과 음란과 두려움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내 스스로, 공허와 허무와 절망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바로 돈을 좇으며 사는 마태입니다.

내가 바로 거짓과 위선에 빠져 사는 마태입니다.

내가 부모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민족을 버리고 내 이기심에 빠져 사는 마태입니다.

내 안에는 의로움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니 정말 이게 왠 은혜입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9:13)

여러분 예수님은 전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이름을 레위에서 마태라고만 불렀습니다.

그가 쓴 책 마태복음에는 그의 이름을 유대인들에게 듣기 좋은 레위라고 말하지 않고 항상 세리 마태라고만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세리 마태라는 말은 내가 세리짓을 한 큰 죄인인데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항상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라고 외치는 자가 마태입니다.

이제 큰 두 번째로 마태는 어떤 사람입니까?

두 번째로 마태는 은혜를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마9:9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9:9)

마태는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세관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돈이 행복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삶에 참 자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시기 전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네 죄를 사하였다고 말씀하신 사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도 바로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는 어떤 죄라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차마 예수님을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는 어릴 때 레위인으로 살았기에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앞잡이로 세리로 살았기에 진짜 친해야할 유대인 친구는 한명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도 마태에게 말을 거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가장 핫한 랍비인 예수님이 자신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말을 건네주신 것 그 자체로만으로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마태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마치 죽어서 무덤 안에 누워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는 음성과 같았습니다.

돈이라는 무덤에 갇혀 사는 마태에게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거대한 빛이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을 꽁꽁 묶고 있는 돈의 쇠사슬을 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눅5:27-28)

누가는 마태가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기록하였지만 정작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 따랐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태에게는 예수님을 따라는 것이 중요하지 그가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지금까지는 돈이 전부였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예수님이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태는 평소에 자신을 알았던 세리였던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이제 송별잔치를 합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9:10-11)

이 잔치에 대해서도 마태는 그냥 자신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렸다고 기록합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눅5:29)

마태의 눈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큰 잔치를 하여도 그것은 작은 섬김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잔치라 말하지 않고 그냥 음식을 잡수시게 하였다라고만 기록하였습니다. 마태에게는 자신이 큰 잔치를 벌인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음식 대접하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크지 자신의 섬김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섬김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태는 정말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해 드린 것이 많은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것 같습니까? 아직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 것을 모르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정말 깨달은 자는 예수님에게 다 드려도 부족할 뿐입니다.

마태는 레위인으로 제사장 직을 버리고 로마의 앞잡이, 세리가 될 때 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좇아간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전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친히 찾아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초청하였을 때 그것은 그의 인생에 최고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돈도 버렸습니다. 직업도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에는 예수님이 전부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마태의 결단에는 마태가 평소에 남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깊은 허무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가 혼자 깊이 고민했던 공허가 권태와 허무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를수록 그의 마음에는 열정이 넘쳤습니다.

마태는 예수님 곁을 묵묵히 따라 다닌 후 나중에 마태복음을 기록합니다.

마태는 4복음서 중에 가장 긴 마태복음 28장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당시 기록문서는 오늘날 종이가 아닙니다. 양피지나 파피루스입니다.

양피지는 양의 가죽입니다. 양1마리를 죽여 만든 양피지에 몇 글자 쓰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다 기록하려면 몇 십 마리의 양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는 엄청난 열정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세리로서 3개 국어를 하는 자였기에 헬라어로 마태복음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세리로 평소에 세무장부를 정확하게 기록한 습관이 있었기에 마태복음을 정확하게 꼼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세리였기에 화폐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록하고 통계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세리였기에 마태복음에는 품꾼의 비유, 빚 탕감의 비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 등과 같은 재물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그는 원래 레위인이었기에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구약에 대한 인용이 많고 예수님을 율법과 예언의 완성으로 오신 메시야로 소개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낭비하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조차도 다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큰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재능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크게 쓰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를 믿게 만드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고 또 지금까지도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