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내 길의 끝에서 비로소 예수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죽는 날이 예수가 사는 날이었고 내가 파산하는 곳에서 예수가 부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평안하고 무사할 때 예수는 내 일부였고 악세사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망이 내 앞에 밀려와 하루아침에 내 삶은 깨어진 난파선의 조각처럼 흩어져 버렸을 그때 절망의 바다위로 예수님께서 걸어오셨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예수님을 실재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모든 절망의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고백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듣는 간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안 될 때, 나에게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절실히 깨달을 때, 아무데도 기댈 언덕이 없을 때,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내게 등을 돌릴 때, 말기 암으로 몇 달 살지 못한다고 사형선고를 받을 때, 남편이 사고로 감자기 나를 떠났을 때, 20년 30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쫓겨날 때, 자녀가 갑자기 집을 나가 연락이 끊어졌을 때,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할 때, 갑자기 돈이 다 사라졌을 때…
모든 것이 끝이라고 느낄 그 때가 끝이 아니라 그 곳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여러분 절망을 만났다고 해서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모든 절망의 골짜기는 희망의 봉우리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나인성 과부는 정말 깊은 절망에 빠진 자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7:11)
‘그 후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어떤 백부장의 하인이 죽어가는 데 기적적으로 고치신 이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나인 성으로 가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인성으로 가는 무리는 조금 전에 죽어가는 백부장 하인을 고친 기적으로 기쁨과 생명이 넘치는 행렬입니다. 반면 나인성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한 무리는 죽음과 절망의 행렬입니다. 이 두행렬이 성문 앞에서 절묘하게 마주칩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7:12)
‘나인’ 성의 이름의 뜻은 ‘즐겁다’ ‘기쁘다’인데 그 성에서 나오는 무리는 즐겁기는 커녕 절망의 행렬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일찍 죽었고 지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죽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남편이 일찍 죽었다는 것은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이제 오로지 독자인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은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희망이 죽으면 절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내가 가진 절망을 정직하게 주님께 내 보이십시오.
나인성 과부는 아들의 시신이 담긴 상여를 따라 나인성에서 나와 성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할 것은 오직 주님이 오시는 무리 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 두 행렬이 마주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절망의 깊은 계곡에 빠진 그녀 곁에 다가오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7:13)
누가는 예수님을 그냥 랍비나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주께서’ 라는 엄청난 단어를 사용합니다.
‘주께서’는 큐리오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예수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나를 만드신 주인이시다는 말입니다.
깊은 절망에 빠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라는 헬라 말은 창자까지 뒤틀리는 아픔을 느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나의 주인이신 주님은 내가 아파하면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기에 나보다 더 아파하십니다.
그녀는 평생 처음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예수님의 ‘울지 말라’는 따뜻한 음성을 들었습니다.